현실을 인정하는 것과 현실에 무릎꿇는 것의 차이

지금으로부터... 몇년 전 일이었습니다.

저는 친구들과 함께 술자리에 있었고 당시 병원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처우개선을 위해 투쟁하던 것에 대해 한 친구가 이야기를 꺼냈습니다. 그 친구는 의대생이었고 따라서 의사들이 어떤 상황에서 일하는지 어떤 대우를 받는지에 대해 상대적으로 잘 알고 있었겠지요. 그래서였는지 혹은 자신의 지망집단의 이익이 침해받는 것이 싫어서였는지는 모르겠지만, 어쨌든 그 친구가 가진 입장, 즉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에 대한 입장은 부정적이었습니다. '업무를 방해할 정도더라' 는 것이었죠.

당시에 저는 휴학상태의 비정규직 노동자였습니다. 육체적으로 고된 일은 아니었고 또 보람도 큰 일이었지만 일주일에 하루씩은 꼭 밤을 새워 줘야 하고 또 아르바이트로 보자면 많지만 생활기반으로 삼기에는 부족한 보수를 받는 일이었습니다.

저 친구는 저 투쟁에 대해 '정규직으로 전환해달라는데 그럼 그걸 다 전환하는게 말이나 되냐. 쉽게 뽑혀놓고 나중에 전환해달라고 하는건 너무하는거 아니냐?' 라고 했습니다.

그리고 저는 거기에 동의했습니다. 그러자 술자리를 같이 하던 나머지 친구들이 동요하더군요. 의사지망생 친구가 처음 해당 화제를 던졌을때보다 더 크게 동요하더군요.

'XX 너 그럴줄 몰랐다' , '야 네가 어떻게 그럴수가 있어' 등등.



제가 왜 동의했을까요? 간단합니다.

저는 현실을 인정했습니다.
비정규직은 쉽게 잘린다고는 하지만 그만큼 '덜 유능한' 분들도 뽑혀서 보수를 받을 수 있다는 현실을 인정했습니다.
정규직으로 전환한다고 하면 결국 예산에 맞추기 위해 인원을 줄일 수밖에 없다는 현실을 인정했습니다.
경제학에 충실한 경영자는 이윤추구를 최우선으로 할 수밖에 없다는 현실을 인정했습니다.




경영자가 생산향상과 상관없는 비용을 들여서 직원생활수준을 향상시켜주는걸 기대하는 것보다는 고양이한테 생선가게를 맡기는게 더 나을 겁니다. 법과 제도와 누진세를 통해서 적절한 규제와 부의 재분배를 행할 수 있는 것은 국가 뿐입니다. 그리고 우리는 그 국가의 정부를 투표로써 구성할 수 있습니다.

그리고 우리는 그 국가를 감시할 수 있습니다. 우리만이 감시할 수 있습니다.

현실을 인정했지만 무릎은 꿇지 않았다는 겁니다.





............................비분강개하시는 분들은 많은데 행동하기에 지쳤다고 하시는 분들도 많아서, 옛 기억을 좀 꺼내봤습니다.




강간당하는데 저항하다가 힘들다고 그냥 누워버리면 어떻게 될까요. 지금 상황같지 않습니까?




"리얼리스트가 되자, 하지만 가슴 속에 불가능한 꿈을 지니자"

산에 올라가려면 우선 발로 땅을 디뎌야 하는 법이죠.

by kane0083 | 2008/12/15 17:34 | In dusk of life | 트랙백 | 덧글(1)

트랙백 주소 : http://kane0083.egloos.com/tb/4012563
☞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(트랙백 보내기) [도움말]
Commented by 루아 at 2009/01/12 16:40
부의 재분배는 정부차원의 문제라는데 대해 공감합니다. 회사차원에서 재분배 하려다간 미국 자동차 업계 꼴이 나죠. 뭐 우리나라 정부에는 빌어도 나올 돈이 없습니다만. 분하지만 어쩔 수 없는, 냉혹한 자본주의세계의 현실이랄까요...
※ 로그인 사용자만 덧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.

<< 이전 페이지다음 페이지 >>